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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 돌아가는길. 첫번째

지나19 2023. 12. 3. 18:07

우리 형제는  모두 다섯이다.

큰언니, 작은언니, 오빠, 나, 남자동생.  이렇게 오남매가  엄마, 아버지와 살았다.

내 기억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때는  우리집이 살기가 괜찮았던듯 싶다.

지금도 대구 서성로의 빨간 벽돌담을 기억한다. 제법 높은 담이 길게 서 있었던듯  그 골목 입구에는

정원이모라는  이모가  벽돌담에 기대듯이 좌판을 펴놓고  사탕과자 등을 팔았던것같다.

토막토막 나는 기억은  뚜렷하진 않지만  나는 이 어릴적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이 글을  써 보려한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것은  엄마와 아버지의 만남이다.

요새말로 아버지는 돌싱이었고  엄마도 아이하나가 딸린 돌싱이었는데  아버지는 삼척이 고향이고  엄마는 풍기가 고향이라는데  어떻게 만나셨을까? 교통도 좋지않던 그 시절에......

이건 내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수도 있다. 아버지 말로는  부인이 바람이 나 도망을 갔다고 했는데  난  반 쯤만 믿는다.

엄마는  결혼을 했는데  돌림병이 돌아  남편이 죽고  언니만 데리고 살다가 아버지를 만났다 한다.

엄마친척들 얘기를 할때 나오는 도시들 이름은 풍기, 영주, 단양, 춘양,  아버지는 삼척, 묵호.얘기를 많이 하셨었다.

엄마 친구가  중매를 서서 결혼을 했다는데   사람의 만남은 참 신비스럽다.  아버지가 풍기로 놀러오셔서 만났다 하는데

아버지 친구가 풍기에 있었고  또 그분과 아는 사람이 엄마의 친구였다는것이다

 

아버지는  삼호방직이라는 회사의 보일러 기술자 였고  아마도 그 기술을 일본에서 배워 오신듯 싶다.

아버지가 처음 부인을 두고 일본으로 가셨다는 말을 들은것 같아  짐작하는것이다.

당시 그 공장은 대구에서도 제법 컸던공장이었고  아버진 봉급도 많이 받으셨는데  술값으로  쓰는게 더 많아서

엄마는 항상 돈이 없어 전전긍긍 하셨던듯 하다.

빨간 벽돌담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우리는 어느새 도시의 변두리로 이사와서 살고 있었다.

너무 어려  어떻게 해서   변두리 동네, 집 옆과 뒤는 논이고 집왼쪽은  산아래 였다. 산이 약간 무너진것 처럼   집에서 산으로  가려면  작은 오솔길로  올라가야 했다. 비가오면  그 오솔길에는 작은 도랑이 생기고  나는 빨래를 하기도 했고

그작은 도랑의  바위틈으로는  목이버섯처럼 생긴것이 비만 오면  올라왔는데  아버지는 그걸 따다가 잡수시곤 했다.

요즈음은 공해 때문에 아예멸종이 된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