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은 양철지붕집이었다.
내 짐작으론 사업을 해서 돈을 다 없앤 엄마가 도시 변두리에 땅은 빌리고 집만 지었던것 같다.
일년에 한번인가 두번쯤은 어두워진 저녁에 엄마가 쌀인지 뭔지를 이고 같이가자 하셔서
따라가보니 나도 모르는 집에 주고 오셨다. 아마도 땅세를 주고 사신듯 하다.
그집은 일자로 지은 방이 세개였고 집옆에 방이 더 있었는데 처음엔 그곳이 닭장이었다.
닭장앞에 노란 국화꽃이 이쁘게핀 가을 엄마와 이모가 국화꽃 속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닭장이 없어지고 방이 들어오고 세를 놓았는데 세든 아줌마는 채독이 걸렸다면서
얼굴색이 노랬는데 밥먹을땐 꼭 된장 찌게를 끓였다. 무우를 넣고 자작하게 끓였는데 맛있게 얻어먹은 기억이 난다.
양철지붕은 비가오면 빗소리가 음악소리 처럼 들려서 비가오면 마루에 휘장을 치고 놀았다.
엄마는 작은 이모네 점포 이층에서 당구장을 했는데 아침에 나갈땐 보름달 처럼 둥근 빵을 사서 우리 형제들에게 하나씩
안겨주고 출근 하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하나는 해는 저무는데 날씨는 춥고 오빠와 둘이서 엄마 몸빼 다리하나는 오빠가 들어가고 하나는 내가 들어가 언니가 빨리 집에오길 기다렸다.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와야 저녁을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회사 다니셨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버지의 기억는 많지않다. 아버지는 술을 엄청 드셨다.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가 술을 많이 잡수시고 실수도 많이 하셨는데 달성서씨 집성촌이던 그 동네의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양반집 자손이라고 우대해 주신 덕분에 그래도 그 동네 사람들과 정들이고 산건 아닌가 싶다. 엄마는 그렇게 술을 자시고 돈도 넉넉하게 벌어주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래도 극진히 모셨다. 고개넘어 아버지 친척들이 몇분 계셨는데 엄마보고 여장부라고 하셨다.
그 친척들은 얼마나 법도를 따지시는지 어릴적 기억에도 음식상 차리는것을 보고 놀랐었다. 음식을 고인다 하시던데
고이기 어려운 대추나 밤도 높이가 한 이십센치 정도로 고이고 어른들도 지극하게 모시고 형제간의 우애도 아주 돈독하게 사시는 것을 엄마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논실형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때만 해도 흰 머리에 아주 점잖으신 분인데
그분 며느리는 시에서 효부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집을 짓고 초배를 하고 남동생을 낳으셨다고 한다. 엄마도 부잣집 딸로 태어나 고생을 많이 하시고 사셨다.
그래도 나는 그때 우리가 못사는줄은 몰랐다. 그래도 우리는 밥은 먹고 학교도 가고 도시락도 싸갈수 있었고
집도 있고 우리 주위에는 우리보다 못사는 사람이 더 많았다. 우리집에 밥얻으러 오는 거지도 있었고
옆집에는 개떡으로 때을 에우는 사람도 있었고 동사무소에서 밀가루를 배급받아 매일 수제비와 국수를 해 먹는 집도
있었으니 그래도 우리집은 사람들이 못산다고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