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이여, 나는 감히 사랑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대가 어떠했던 코흘리개 꼬마때부터 그대는 내 오빠로써 나의 울이 되어 주었고
그대 또한 나를 사랑 했었다고 장담 합니다.
어느여름 우리가 무태, 그 강가로 피서를 갔을때 그대와 나의 키를 재며 내가 까치발로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을 기억합니다. 그때는 참 다정한 오누이 였지요. 어느날 밤늦게 귀가 하는 길.
골목엔 왠 사내애들이 모여 떠들썩 하게 해 대는 폼이 동네 불량배임을 안 내가 이 길을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치켜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하이힐 소리도 똑똑 거리며 용감하게 그들 앞을 지나갔습니다.
누군가가 "놔둬라, 아무게 동생이다" 하는 말이 들려오는데 그때사 깜짝놀라 고양이 처럼 풀쩍 뛰어 온 기억이
있습니다. 한때는 그대가 나의 우상이기도 했었지요.내 친구들도 모두들 당신을 좋아했더랬습니다.
당신의 그 언변은 항상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었었지요. 또한 우리 집의 자랑이기도 했습니다.
교복모자에 흰줄이 셋있던 그 학교, 동네 아주머니들이 돈을 주고라도 그 모자 자기 아들에게 씌어주고 싶어했던
그때의 그대는 얼굴조차 미남이어서 모두들 그대를 부러워 했지요.
그러나 세월이 죄인가요? 어느듯 그대는 받는것에 익숙한, 또 어릴적 부터 넉넉지 못한 살림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되어 점점 더 금전만 쫒아가는 사람이 되는듯 했습니다. 서로의 가정이 생기고 서로의 생활 속에서 갈등도
많았고 그대향한 사랑도 퇴색되어 갔던것 같습니다.
그 많았던 우리의 사연이야 저 위의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겠지요?
누가 옳았고 누가 글렀든 이제와서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만 하느님께 부끄럽지 않으면 된 일이지요.
그대가 여기서 떠난지가 십여년, 또 거기서 그먼 경기도로 떠난다는게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그 낮선땅에
이미 딸들이 자리잡고 있으니 나 또한 위로가 됩니다.
나이 칠십넘은 그대가 고향을 떠나 그 먼 곳에서, 다행히 바다가 가까워 그대가 좋아하는 낚시는 할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 라는 생각을 합니다. 부디 행복 하시길, 건강 하시길..........
나도 이제 칠십이니 내가 죽었다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도 마음이 편하실것입니다.
어느날 그대의 부고를 내가 받을지 내 부고를 그대가 받을지....... 그때는 우리의 애증 또한 한줌의 먼지가 되겠지요.
사랑했던 그대여, 잘 가시오. 그러나 잊지는 않으리다. 그대의 행복을 내 하느님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사랑했던 이여, 부디 잘 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