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아, ㅇㅇ아....... 둘째놈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잠이 깨었다.
둘째놈은 내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고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기도 하다.
첫째와는 얘기하다보면 싸움이 되고 내 마음이 많이 다치는데 둘째는 다 아는것처럼 나를 다둑여준다.
남편과 같이 장사 라는걸 하다보니 내 남편은 알고보니 영어도 한자도 몰랐다.
돈으로 돈으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남편의 형제들도 첫째, 둘째는 대학중퇴고 넷째는 전문학교를 다니는걸
보고 내가 4년제로 편입하라 했더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뒤 편입을 하고 졸업하였다.
전문대졸업후 취업을 해서 근무를 해 보더니 편입을 하였다. 내말대로 진작에 했으면 아버지 돈으로 공부를 했을텐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제 돈으로 공부를 해 내었다. 그러더니 처음 조그만하게 사업을 시작하더니 돈을 많이 벌고 형제들
에게도 인색하지 않아 늘 고맙게 생각하는 시동생인데 사형제중 유일하게 베품의 기쁨을 아는것 같다.
우리는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공구 장사를 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똑똑한 처자를 구해 아들에게 사업을 시키려 했고, 엄마는 아버지가 직장생활 하니 늘푼수가 없고 사업하는 사위를 보니 돈을 잘 버는것 같으니 다른건 안 보고
집안 오빠에게서 그 집 인심만 보고 두 사돈이 의기투합해서 결혼시켜 부산 언니곁에서 사업을 하도록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나의 어리석음이 참..... 한심한데.... 생각해보면 국민학교때부터 계속 여자들만 보고 살아온 내가
남자보는 일이 있을리 만무했다. 어쩌면 직장까지 여자만 있는 곳이었으니..... 나는 직장에서 KIT 라고 국제 전화를 봤다. 그때만 해도 시외전화는 물론 국제전화는 교환수를 통해서 연결이 되던 때였다. 그러니 남자와 연애한번 해보지 않은 나는 그저 사람 잘 본다는 엄마의 말을 들을수 밖에 없었다. 그 때는 결혼이 필수였고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했다.
아들 둘을 낳은나는 큰 언니께 아이들을 맡기고 장사를 나갔다. 공구 장사를 하다보니 영어도 알아야 했고 거래처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 받으면 한문도 알아야 했다. 남편은 영어도 알파벳만 알 정도 였고 한문도 아주 쉬운것 조금만 알았다. 게다가 말까지 더듬었다. 처음 남편을 봤을때 말이없어 괞찮았고 시어머니가 그렇게 인자해 보였다.
인연이었든지 나는 결혼생활 중에도 남편의 말더듬을 알아채지 못했다. 노래방에 가면 노래는 또 그렇게 잘 불렀다.
누군가가 지적을 해 줘서 알게 되었는데 남편은 아버지 친구가 말 더듬는것을 보고 흉내를 내다가 그렇게 되었다 했다.
그래서 가게에는 내가 꼭 필요했는데 그때는 구매담당자가 전화로 물건을 주문했다. 나는 담당자가 다 말하기도 전에
받아적었고 빨리 부르라고 재촉 할 정도로 빠르게 주문을 받았고 정확도도 100% 였다.
계산기도 다섯 손가락으로 두드려 댔으니 보는 사람들이 혀를 내 두르곤 했다.
이젠 영감쟁이가 다 되어 잔소리만 늘어난 남편이 이제 일어났다고 티비소리를 크게 했다.
밥 달란 소리다. 이제 영감과 아점을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