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자네대로 살고 나는 내대로 살자..."
예사로 들었다. 언제는 그리 안 살았나? 맡종부인데 돈 욕심만 내었지 내 아들둘 양말 한짝 사준적 없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포기 각서를 보내라고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했다.
"보소, 아부지 돈갖고 형제간에 싸우지 말고 해주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삽시다" 했다.
작은 언니는 나보고 바보라고 아니 등신이라고 타박을 했다. 그래도 그때는 내가 떳떳했다.
우리가 부도로 파탄이 나기전 까지는....
늙으면 마음이 더 너그러워져야 된다는게 내 생각인데 마음이 더 좁아지는건 아닌지....
영감한테 이번 추석에도 내가 아프다고 하고 대구 안가고 싶다고 했더니 대구집 팔면 돈 달라 할까봐 선수 치는거라고....
덩치큰 집을 팔면 내 몰라라 하기가 힘은 들거다. 그저 아버지 유산으로 살아가는데 절에는 열심히 다니두만 부처님의
자비심은 근처에도 못가고.... 우째 생각하면 참 불쌍타. 좋아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티비프로 하나 없고 그렇게 된
이유는 층층시하 시집살이 하면서 꿈도 꾸지 못했던 지난날이 그 원인이 되기도 했을것이다.
나도 젊을땐 그런 형님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보니까 시집살이를 근 오십년을 살았는데 이젠 남편 병수발로
고생하는 형님의 인생이 가여워져 가끔 안부도 여쭙고 국거리도 두어번 사 보내 드렸는데 형님을 그게 내가 딴 생각을 하는가 걱정이 되었나 보다
명절에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형님 눈치보느라 서둘러 어머니 방에서 나와야 되었다.
우리가 맞벌이를 하면서 애들 둘 다 우유를 먹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유값이라고 오십만원, 백만원씩을 꼭 주셨다.
그당시 그돈은 참 큰 돈이다. 나는 기차를 타니 기저귀 가방에 기저귀로 꼭꼭 싸서 가방 제일 깊은곳에 넣고 야무지게 챙겼다. 그런데 형님이 자네 가방 내가 야무지게 싸줄께 하면서 가방을 다시 정리 해 주곤 했다.
이제 생각하니 형님이 내가 돈을 가져가나 안 가져가나 가방 검사를 했던 것이다. 그당시 나는 애기 손수건 하나 빠뜨리지 않고 야무지게 챙겼다. 지금은 정신이 없어 하나씩 빠뜨리고 오기도 하지만 예전의 나는 총기가 있었다.
근데 총기는 총기고 참 눈치없고 어리석었다. 순수했다 할까? 직장생활까지 했는데도 나는 발랑 까지지 못하고 어리석기만 했다.연애도 못해보고 남자 보는 눈도 없고 세상보는 눈도 없고 그저 엄마가 맨날 말씀하신대로 내가 좀더 참고
내가 한번 더 움직이고 그저 남을 배려하고....
우리 형제들에게 엄마는 다 그렇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은 나 뿐이었다.
그래서 친정 아버지는 날 큰 집 맡며느리로 시집 보내고 싶어 하셨다.
일 하는건 몰라도 마음 쓰는건 자신 있었다. 형제간에 우애있게, 서로 나누고 다둑이며 살고 싶었다.
그런 큰 형님이 너무 야속해 내가 대구 안갈란다 하니 영감은 엄마 돌아가시면 가지말자 했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형님이 " 인제 엄마 살아계실때 보다 더 잘 지내자 " 해서 마음을 풀고 같이 놀러도 다니고 했는데 큰 형님이 되어서 밥 한번 사는일이 없고 잘 사는 막내 동서가 맨날 밥을 샀다.
마음을 넓게 쓰자고 하면서도 형님의 그말이 자꾸 떠 오르는걸 보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 가기는 아직도 멀었다.
갱희야, 그라믄 안된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