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야, 시간 있나? "
점심을 먹는 도중에 포항 언니가 전화가 왔다. 부산엘 오는데 해운대 도착이 세시반이고 저녁엔 다시 포항으로 가야
된다며 시간이 된다면 만나자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해운대로 갔다. 그쪽으로 다녀온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거리는데 가는 길 옆에는 전에는 없던
고층 아파트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동백섬 가까이 부터는 공기부터 부산한듯 왠지 바쁜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생긴 터미널을 물어서 찾아가니 차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같이온 이질은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우리는 무인 찻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앉았다.
자판기와 테이블 몇개가 있는 찻집은 노부부인지, 두 사람이 창가를 향해 앉아 있었고 우리는 안쪽자리에 앉았다.
자판기 정도야.... 하고 주문을 했는데 도대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카드를 넣으라 해서 카드를 넣었는데도
아무리 해도 그다음이 진행이 되지 않아 툴툴 거리니 창가의 노 부인이 와서 도와 주었다.
덕택에 커피 두잔을 먹었는데 나중에 물을 좀 마시려니 도대체 물을 마실수가 없었다.
얼음도 물도 나온다고 되어있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었다. 마침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길레 말했더니 커피주문 하고 먼저 얼음을 주문하면 나오고 물과 얼음은 따로 주문이 안된다 했다. 내 생각엔 이 젊은 사람들이 옆에서 가게를 하면서 무인
점포도 내어놓고 수시로 들러 보는듯 하였다. 자기 점포에서 물을 가져다 주어서 두 자매는 목을 축이며 회포를 풀었다.
오랫만에 엄마와 아버지의 과거사도 들어보고 친정 친적들 얘기도 나누고....
언니는 전생에 어떤삶을 살았는지 하여튼 복이 많다. 좋은 남편 만나 돈도 잘 벌어 경제적으로도 풍족했고
언니가 형부께 억지 투정을 해도 형부는 다 받아들여주고 다둑여 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들넷을 보았는데 큰아들은 물리학박사, 둘째는 성형욋과 의사, 셋째도 잘 만난 처가 덕택에 걱정없이 살고 있고
다만 네째 아들만 마흔 네살 되던해 원룸에서 혼자 죽어 일주일만에 발견이 되어 가슴아픈 이별을 했다.
어릴적 부터 과보호를 받았던지 그 아들은 도대체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애를 먹였는데 보내고 나서도 언니는 잘
극복해내더니 형부 돌아가시고도 예상외로 잘 지낸다. 신앙의 힘이 그중 큰 듯하고 아들놈들 명성 덕에 더 잘 견딘듯 했다. 언니는 갈등없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고 참진리를 찾아 헤메던 나는 신앙생활 조차도 힘들게 이어 나간다.
팔십이 넘어서도 등산도 가고 성당가는길을 한시간씩 걸어서 가기도 하고, 예전엔 남자들 멱살잡이 까지도 하던 억척언니인데 건강해서 부럽기도 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프다고 어느놈이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잘 사는 언니가
사주는 갈비탕을 들고 오면서 그래도 잘 살아서 내가 부담없이 얻어먹을수 있는게 어디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살아줘서 나한테 손 안벌리는 형제들이 있어 그나마 내가 편하게 산다.
그리 생각하니 세상 부러울게 없다. 자주자주 안부전화를 해오는 아들놈들을 생각하면, 나혼자 짝사랑 한다고 섭섭할때도 있지만, 그래도 길가에 채소 몇개 놓고 앉아 있지 않아도 되는 내가 다행이다 싶다.
사는건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하느님 아부지 ,예수님, 성모님,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할수 있게 도와주시이소.
당신이 만드신 사람들 아입니꺼? 당신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봄날을 보십시오. 눈물나게 아름다운 꽃들을 보십시오.
아부지, 저는 아부지의 생각을 알 길이 없습니다만 , 다만 우리 사람들에게 이롭게 모든것을 이끌어 가신다고 믿습니다.
어려운 수학문제 보다 더 어려운 이 세상살이, 모두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아부지, 다른 사람들은 아부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저는 감히 사랑한다고는 못합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흠숭하는 저를 어여삐 여기시어 제 기도 들어주소서.
고맙습니다, 하느님아부지, 예수님, 성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