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아들만 셋낳아 힘들게 사는 과부를 보쌈해와서 자식을 보았는데
아들만 낳던 그 할머니는 딸만 셋을 낳았다. 엄마는 둘째딸이 었다.
큰 언니가 기억하기를 외갓집은 풍기 역 바로 앞 제일 큰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울엄마는 밑반찬을 안 만드셨다. 지금 기억에도 따로 장아찌나 밑반찬을 만들지 않으시고
난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다른 사람들 사는걸 보니 때때로 밑반찬을 만들어 놓고
먹는것을 알게 되었다.엄마는 부잣집 딸이 되어서인지 살림 사는건 못배운 모양이라.
실제 아버지와 결혼후 엄마는 직조공장을 경영하셨다 하시고 한해는 엄마공장에서 만든 유똥 이라는 천이
유행이 되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근데 아버지가 편찮아 지셔서 아버지 병원비로 그 많은 돈을 다 쓰시고
무일푼이 되어 대구 서성로 붉은 벽돌담 집에서 사시다가 변두리로 이사 하셨다.그때 내 나이가 세살이었다.
세살어린 동생을 아직 도배가 마르지도 않은 집에서 낳았다 하셨다.
아버지가 병이 깊어지니 환청이 오고 사람들은 귀신 들렸다고 굿을 하라했는데 엄마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슨 병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과 질환이었던것 같은데 아버지병은 산부인과 의사가 치료해서 나았다 한다.
큰 언니 작은 언니는 그당시 유치원도 다녔으나 오빠부터는 유치원도 못가고 시내 변두리 집옆엔 논이고 산이고
작은 시골 같은데서 자랐다. 양철지붕은 비가 오면 빗소리가 어떨땐 음악소리처럼 어떨땐 소음처럼 들렸고
앞 뜰엔 채소를 심었고 나중엔 닭도 키웠다 우물도 있었고, 동네어른들이 아버지와 엄마를 양반대접을 하였던지
동네 사람들은 모두 우리집을 부러워 하였다. 잘 사는건 아니었겠지만 그당시 그동네는 요즘말로 달동네였는데
엄마는 아침에 산 넘어에서 오는 손님에게 밥을 한 그릇정도씩 주었고, 당시에는 밥 얻으로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작은 언니는 많이 준다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하고 엄마는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았다.
우리가 밥을 먹기전이라도 먼저 밥을 주어 보냈다. 그렇게 도시 변두리의 논 밭, 들과 산을 쏘 다니면서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