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쟁을 겪지않은 세대다. 전쟁중에 태어났지만 내고향 대구 까지는 전쟁터가 되지않았고 53년에 휴전이 되었는데
나는 52년 에 태어났고 그당시 우리집은 잘 살았던것 같다. 큰언니, 작은언니, 모두 유치원을 다녔을 정도고
내 기억속 우리집 가는 골목엔 붉은 벽돌담이 높게 쳐져 있었던듯 하다.
그러다가 그 다음 기억은 대구시 변두리, 집옆은 논으로 되어있고 집 왼쪽엔 산이 있었고 집 옆엔 절벽처럼 되어있어
동생은 산위 나무에 줄을 매어 그 절벽을 타고 놀기도 했다.
그렇게 전쟁후 어려운 시절에 학교에서 처음엔 집에서 컵을 들고 학교를 가면 분유끓인 우유를 얻어먹었다.
그다음엔 옥수수죽을 끓여주어 컵으로 받아 수저도 없이 입으로 조금씩 마셨다.
그러더니 이젠 옥수수떡이 나오기 시작했다. 옥수수에다 우유를 섞었는지 우유냄새가 나면서 구수 하고 맛이 있었다.
그 당시엔 다 가난했기 때문에 학생들 모두가 그것들을 학교로 부터 얻어 먹었다.
그런데 이번 우크라이나 상태를 보니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침에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것이 괜히 미안해 졌다.
그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편하게 앉아 식탁에 앉아 있으니.....
내가 할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같이 아파할수 밖에...... 일요일인데 또 티비로 미사를 드리고 나니
세레나 형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펠리지다스 형님께서 돌아 가셨다 한다. 집과는 한참 먼 곳에 모신걸 보니
그 아들이 일부러 그런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 아들은 우리가 형님께 찾아뵙는것도 싫어하고 우리한테 인사도
하지 않아서 우리가 방문을 자제하고 그저 선종 하시기만을 기도 드릴뿐이었는데 전염병이 유행한다는 핑계로
조문을 가지 않고 화살기도만 하였다. 나도 참 이기적인 사람인것 같아 마음이 편하진 않았는데 그 형님을 뵌지가
벌써 근 십년이 가까워온다는 핑계를 대고 애써 마음 편하자 하고 있는 내가 꼭 이중 이격자 같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참, 마음대로 할수 있는게 많지 않다. 세레나 형님은 주일미사도 가지 않는 내가 못마땅 하신것 같지만 영감이 꺼려 하니 어린 손자도 봐야 하는 내가 어쩔수가 없었다. 내일 또 손자를 봐주러 가야 되기 때문에 참아야지 도리가 없다. 영감 계원 한명도 아직 육십이 되지 않은것 같은데 뇌경색이 와서 말도 못하고 병원에 있단 전화를 오늘 받았다. 문병을 갈수도 없고, 안타깝다.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혼자 산다 하는데.....
그런 저런 얘기를 들어 보면은 그래도 나는 참 다행이다 싶다.
굵은 몸매로 불편하긴 하지만 그것도 내 운명이려니 한다. 벌써 한 이십년가까이 되는데 자궁근종으로 적출수술을 했다. 자궁을 들어내면 80%는 살이찌고 20%는 살이 빠진다 한다.안그래도 통통 했는데 살이 조금씩 찌고 있었는데
어느날 부터는 누가 내 몸에 바람을 불어 넣는듯 몸이 붕글붕글 부풀기 시작했다. 그냥 평소대로 먹고 평소대로 사는데
몸이 그렇게 부풀어 오르니 겁이 났다. 그때부터 살이 안찌게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 몸무게는 지금도 그대로다.
팔도 가늘어지고 배도 살이 빠진것 같고 다리도 가늘어 졌는데 어찌 몸무게는 그대로고 옷도 그 사이즈 그대로 인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내가 걱정하면 영감은 그냥 마음 편하게 살아라 한다.
내가 죽으면 내 관을 드는 사람들 고생시키겠다 하고 죽은 뒤 또 남에게 폐끼칠것을 걱정한다.
고양이에게도 그랬다. 야옹아, 내가 늙으니까 내걱정 보다는 니 걱정이 더 크구나, 내가 죽으면 니를 거두어줄 사람이 없는데 우야꼬? 아프지 말고 가는 잠에 가거라......
늙으니까 걱정도 많다. 자식걱정은 자식이 잘 살든 못살든 걱정이지만 세상일도 걱정이 된다.
내맘대로 할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예전 어른들 말씀대로 걱정도 팔자란 말을 다시 생각한다.